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인민지원군 (문단 편집) === 중공군의 대공세 및 서울재점령 (1950.12.31~1951.1.8) ===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마오쩌둥]]은 의외로 전황이 잘 풀리자 [[맥아더]]와 마찬가지로 적을 과소평가하고 간이 커져 아예 한반도 전체를 "적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민지원군에 38선을 넘어 진격하라는 무리한 명령을 내렸다.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명분은 미군이 38선을 넘은 것을 도발행위로 간주한 것에 따른 방어행위이기 때문에, 자신이 38선 넘어로 진격한 것은 빼도박도 못하는 [[내로남불]]인데다가 무모한 공격이나 마찬가지였다. 38선이 지나는 개성에서 일단 정지했던 중공군은 12월31일부터 대공세를 펴서 38선을 넘어왔다. 유엔군은 급격한 후퇴로 부대 정비가 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취약했고, 중공군의 포위를 피해 서울을 내주고 일단 후퇴했다. 결국 1월 4일, 중공군과 인민군은 3개월만에 서울에 재입성했다.([[1.4 후퇴]])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zhongyang.jpg|width=100%]]}}}|| || 1951년 1월 4일 [[중앙청]]을 점령한 후 기뻐하는 중공군 || 중공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대담하게 [[공세종말점]]을 넘어 서울 이남으로 진격했으나, 재편성을 마친 미8군단과 10군단은 반격으로 나왔다. 인해전술에 얻어맞던 미군들도 익숙해져서 고화력 무기를 무차별로 투사해 섬멸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왔고 특히 미국의 압도적인 제공권 아래에서 공중지원 없이 싸웠기 때문에 중공군은 미군의 화력에 큰피해를 봤다. 애초에 숫자가 많다는건 그만큼 보급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보급선이 길어지면 보급에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후술하지만 미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 총사령관에 앉은 펑더화이조차도 보급사정이 너무 열악하니 신경써달라고 몇번이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와 싸워댔으니 말할 필요도 없는 셈. 그렇기에 장기전과 불필요한 진격은 어리석은 선택이나 마찬가지였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결국 중공군은 진격을 멈추고 방어에 나섰지만 준비된 미군의 지상, 공중화력은 너무나 막강해서 매복이 어려운 평지로 나온 중공군 부대들은 비전투시에도 폭격을 두들겨 맞으며 큰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